페르난도 토레스는 리버풀에서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첼시 이적 후 부진한 경기력으로 많은 논란을 낳았고, 이후 말년에는 친정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일본 J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전성기 시절과 첼시 시절의 경기력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말년에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토레스의 축구 인생을 돌아보며 그 변화의 원인을 분석해 본다.
1. 전성기였던 리버풀 시절, 완벽한 스트라이커
페르난도 토레스는 2007년 리버풀에 입단하며 프리미어리그에 등장했고, 단숨에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자리 잡았다. 그의 빠른 스피드, 날카로운 골 결정력, 그리고 세밀한 드리블은 프리미어리그 수비진을 압도했다. 첫 시즌이었던 2007-08 시즌, 그는 리그에서 24골을 기록하며 리버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낸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특히 스티븐 제라드와의 호흡은 전성기 토레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제라드의 날카로운 패스와 토레스의 침투 능력은 완벽한 조화를 이뤘고, 이는 수많은 득점 장면으로 이어졌다. 리버풀의 전술도 토레스에게 최적화되어 있었다. 역습 상황에서 그의 스피드를 활용하는 패턴이 자주 등장했고, 토레스는 이를 통해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며 득점 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잦은 출전과 상대 수비수들의 거친 태클은 그의 몸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리버풀에서 3년 반 동안 활약한 그는 2011년 1월, 당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 이적료였던 5000만 파운드에 첼시로 이적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시간은 리버풀 시절과는 전혀 달랐다.
2. 부진했던 첼시 생활, 무엇이 문제였나
첼시 이적 후 토레스의 경기력은 급격히 하락했다. 가장 큰 문제는 첼시의 전술이 토레스에게 맞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리버풀에서는 빠른 역습과 직선적인 패스를 중심으로 플레이했지만, 첼시는 보다 점유율을 중시하며 조직적인 플레이를 강조하는 팀이었다. 이 때문에 토레스는 원하는 위치에서 공을 받기 어려웠고, 특유의 침투 플레이를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심리적인 부담도 컸다. 당시 5000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이적료는 큰 기대를 불러왔고, 첫 경기부터 팬들과 미디어의 압박이 상당했다. 토레스는 14경기 동안 무득점에 그쳤고, 이는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졌다.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는 장면이 반복되며 그는 점점 더 위축되었다. 신체적인 변화도 무시할 수 없었다. 리버풀 시절부터 이어진 잦은 부상과 혹독한 프리미어리그 일정은 그의 스피드와 민첩성을 서서히 떨어뜨렸다. 예전처럼 상대 수비수를 제치고 치고 나가는 모습이 줄어들었고, 이는 경기력 저하로 직결되었다. 물론 첼시에서도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2012년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극적인 골을 넣으며 팀의 결승행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경기력을 봤을 때, 리버풀 시절의 압도적인 모습과 비교하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그는 2014년 AC 밀란으로 임대된 후 친정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복귀하게 된다.
3. 말년의 토레스, 스페인과 일본에서의 도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온 토레스는 완전히 부활하지는 못했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팀에 기여했다. 특히 2015-16 시즌에는 중요한 순간마다 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리버풀 시절과 같은 스피드는 없었지만, 위치 선정과 베테랑다운 경기 운영으로 여전히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출전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2018년 결국 일본 J리그의 사간 도스로 이적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일본에서의 토레스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선수였다. 화려한 드리블과 폭발적인 스피드보다는 경험을 활용한 경기 운영과 연계 플레이를 중점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존재는 팀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하지만 J리그에서도 경기력 저하는 피할 수 없었다. 2019년 그는 결국 은퇴를 선언하며 18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결론: 리버풀의 전설, 그러나 아쉬움도 남긴 선수
페르난도 토레스는 리버풀에서 축구 인생의 전성기를 보냈고,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유로 2008과 월드컵 2010 우승을 경험하며 세계 최고의 공격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첼시 시절의 부진은 그의 커리어에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중요한 순간에는 빛났지만, 리버풀 시절과 같은 위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경험을 바탕으로 팀에 기여했으나, 더 이상 세계 최고 수준의 공격수로 군림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커리어는 충분히 위대했다. 리버풀 팬들에게는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 있으며, 축구 팬들에게도 기억될 만한 선수다. 지금은 지도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기대된다.